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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독립운동의 특징, 임시정부 수립과 조직, 임시정부 시련기

by 다희올린 2024.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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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독립운동의 특징

한국의 독립운동이 다른 국가와 민족에 비해 독특한 부분을 가졌다. 여러 특징 가운데 하나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거론할 수 있다. 독립운동을 정부조직체로 펼쳐나간 점과 27년 가까이 존립하면서 활동한 사실은 세계사적으로 특이한 사실이다.

 임시정부에 관한 연구는 많은 굴곡을 거쳐왔다. 오랜 기간 동안 투쟁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귀국하는 단계에서부터 제자리를 찾기 힘들었고, 해방정국에서는 남북분단과 미군정의 정책 및 이승만의 배척 때문에 중국에서 보낸 시련보다 훨씬 모진 시련이 있었다. 임시정부사 연구는 1960년대 중반 이후에 겨우 고개를 내밀게 되었다. 1970년대 들어 독립운동사 연구가 시작되었고, 임시정부사 연구도 서서히 시작되었다. 그러나 분단과 냉전논리에 따라 독립운동사 전체 연구동향과 마찬가지로 임시정부사 연구도 불완전하게 진행되었다. 1980년대 후반에 민주화운동 중에 임시정부가 또다시 격렬한 비판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이에 대한 연구는 꾸준히 전개되어 왔다.

- 임시정부 수립과 조직

임시정부는 중국 상하이에서 1919년 4월에 수립되었다. 1910년 상하이지역에서 조직된 동제사와 신한청년당 등의 활동이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구실을 하였고, 혁명적인 분위기, 국제항구의 특성이 정보 수집과 활동을 쉽게 만들었다. 상하이지역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될 터전을 만들어낸 제1세대는 당시 청년세대였다. 이들에 의해 동제사와 신한청년당이 조직 운영되었고 그 활동이 임시정부 수립의 터전이 되었던 것이다.

 임시정부는 수립되자마자 정통성을 확보하려 하였다. 국내에서 비밀리에 조직된 한성정부를 정통으로 삼고 체제를 개편한 뒤 1919년 9월에는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와 통합을 달성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대표성을 지니는 정부로 자리 잡았다. 

 임시정부는 행정부와 의정원으로 구성되고 그 직할 조직으로 민단을 두었다. 행정부는 초기에 대통령제로 운영되고 시기에 다라 7~8개의 부로 구성되었다. 임시정부는 행정과 정보의 연결망으로 연통부와 교통국을 두었다. 정부의 기반을 확보하고 상하 행정기관 사이의 통신업무와 자금 모집 및 국내 행정을 장악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 교통국은 교통부 산하 조직으로 각 지방의 연락조직망이었다. 이는 임시정부가 국내와 만주 등 각지에 지도권을 확보하는데 목적을 둔 조직이었다.

- 임시정부 시련기

임시정부는 1920년 말을 고비로 점차 쇠락하기 시작하였는데 교통국과 연통부를 통한 국내와의 연결망이 일제 경찰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면서 국내로부터의 지원이 거의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국민대표회의 소집으로 나타났다. 국내외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자들을 한자리에 모아서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의 상황을 점검하고 진로를 모색하려는 것이었다.

 1921년 5월 이후 안창호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자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1922년 말에 3백여 명의 독립운동계 대표들이 상하이에 운집하였고, 난항을 겪던 자금 문제도 해결되어 1923년 1월에 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독립운동사에 있어 가장 최대 규모의 회의가 4개월 반 동안 열렸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이름에 걸맞게 개혁시키자는 개조파와 임시정부를 없애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자는 창조파로 나뉘어 회의는 결렬되고 말았다. 임시정부는 국민대표회의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주요 인사들이 대표로 참가하였다. 창조파가 주장하던 이승만 대통령 탄핵안을 의정원에 제출하고 5월에 국민대표회의가 헌법을 개정할 수 있게 하자는 헌법개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의정원은 의회 고유의 입법권마저 국민대표회의에 넘기고자 하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가 개조파와 창조파로 결렬된 뒤 창조파가 임시정부를 부인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한다고 결의하자, 당시 내무총장이던 김구는 창조파만의 회의에 대해 해산명령을 내렸다. 

 임시정부는 체제개편 작업에 몰두하면서 1925년 3월에 이승만 대통령을 면직시켰다. 이어 4월에 제2차 개헌을 단행하여 이승만의 독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던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제를 채택하였다. 초대 국무령 이상룡에 이어 1926년 7 월에 국무령에 취임한 홍진은 '전민족대당체의 건립'을 들고 나왔다. 이것은 1925년부터 임시정부 주변을 휩쓸던 유일당운동을 정부 차원에서 추진하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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