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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시기, 충칭시대-한국독립당, 광복군 창설

by 다희올린 2024.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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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징시기 

임시정부를 이끌어 가던 안창호가 체포되고 김구 등 주요 인물들이 일제의 추적을 피해 잠적하여 극비리에 활동하는 동안 임시정부는 가장 미약한 모습을 보였다. 상하이를 떠나 난징 근처인 진강에 정부 청사를 마련하였다. 난징에 청사를 두지 못한 것은 일본이 중국정부에 대해 강력하게 견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강에 청사를 두었지만 사실상 김구와 이동녕 등의 핵심 인물들은 난징성내에 비밀 거처를 마련하고 청년 모집과 군사력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김구는 난징의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교내에 자리 잡은 장제스의 관저에서 회담을 가졌다. 이봉창과 윤봉길의 양대 의거를 치하하는 장제스에게 김구는 한인 청년들을 군사간부로 양성할 수 있는 길을 요구하였고 뤄양군관학교에 한인 청년들을 입학시킬 수 있었다. 한국독립당이 창당된 이후 임시정부 주변에 나타난 여러 정당조직들을 신한독립당으로 통합하고, 남만주에서 활약하던 조선혁명당의 주역이 이동해 왔으며, 의열단이 1930년대에 들어 정당체로서 활동하였다. 이 정당들에 의해 1932년 좌우합작운동이 다시 일어나 대일전선통일동맹을 거쳐 조서민족혁명당 결성으로 나타났다. 임시정부의 여당이었던 한국독립당이 분당되었다가, 다시 김구가 결성한 한국국민당을 중심으로 모였고 난징시대는 양당중심으로 운영되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 중 임시정부 주변의 정치세력이 진영을 재편하여 양대 연합체제를 구성하였다. 하나는 김구가 중심이 되고 다른 하나는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민족전선연맹이었다. 중일전쟁과 일제의 난징침공 무렵 임시정부 주변에 양대연합체제가 형성되었고, 이후 임시정부는 광복진선에 의해 유지되었다.

- 충칭시대

임시정부가 충칭에 들어오기 직전 우파 3당이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 이는 임시정부의 세력 기반을 확대 강화한 것으로 동시에 임시정부의 체제 정비 작업도 병행한 것이었다. 임시정부를 이름에 걸맞은 독립운동의 최고 기구로 만들기 위해 정부와 의정원을 확대하고, 군사조직을 창성하며, 개헌을 통해 단일지도체제를 갖추어 나가기로 작정하였다. 그들은 우선 구무위원을 11명으로, 의정원 의원을 35명으로 확대시키고, 중국 정부의 주선으로 정부 청사를 충칭에 마련하고 임시정부를 이전하였다. 이어 충칭 도착 직후인 1940년 9월 국군, 당군으로서 광복군을 창설하였다. 그다음 달에는 국무위원제를 바꾸는 개헌이 시도되어 김구가 주석을 맡는 단일지도체제를 이루었다.

 우파 3당이 합당하여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있던 상황과는 달리 좌파세력은 분열을 거듭하고 있었다. 김원봉을 중심으로 연합을 이루던 조선민족전선연맹의 4개 조직은 7당 통일회의 직후 분열되어 우파세력과의 통합을 도모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 김원봉이 이끄는 좌파세력은 임시정부로 통합하는 합작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당시까지 일관되게 지켜왔던 임시정부에 대한 부정적 자세를 바꾸어 여기에 참여하는 쪽으로 전환하고자 하였다.

- 광복군 창설

 임시정부는 충칭에 도착하기 1년전쯤 서안으로 군사특파단을 파견하여 병력을 모집하고 군대조직에 대한 양해와 재정 지원 약속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정부와 교섭하였다. 1940년 9월 충칭에 도착하자마자 임시정부는 '국군' 창설에 나섰고, 9월 17일에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성립전례식을 거행하였다. 임시정부는 정신적으로 대한제국의 국군을, 인적 맥락으로는 독립군을 계승한 광복군을 자력으로 창설한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군사위원회의 통제와 간섭을 받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힘을 기울인 결과 1945년 독자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창설한 후 국내에 대한 방송공작을 추진하였다. 충칭의 방송국을 이용하여 광복군이 직접 국내 동포들에게 보내는 방송이었는데 2차 세계대전의 추이와 광복군의 활동 상황을 알리고 국내 동포들의 투쟁의식을 고취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이나 안동농림학교의 국권회복연구회결성 등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고 일제 말기 국내 투쟁의 배경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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