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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에서 대한제국 까지 의병운동과 계몽운동

by 다희올린 2024.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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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교포 러시아 한인 투쟁

1860년대 초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하기 시작한 한인들은 1930년대에는 20만 명에 이를 정도로 많은 수로 증가하였다. 이들 재러동포들은 1905년 을사조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이 일본에 의하여 강탈당하자 국권의 회복을 위하여 가열찬 투쟁을 전개하였다. 또한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조국이 강점당하자 로시아 전역에서 더욱 적극적인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구한말부터 1922년까지 재러동포들이 전개한 이러한 항일투쟁은 1945년 8월 해방에 밑거름이 되었으며 오늘날 대한민국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 조선말기에서 대한제국 까지 의병운동과 계몽운동 

- 의병운동 

일본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아울러 1907년 6월에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서 고종이 파견한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 3인이 한국의 억울한 사정을 국제사회에 호소하려 하자 오히려 이를 기화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황태자로 하여금 그 뒤를 잇게 하였다. 또한 일본은 고종의 양위에 만족하지 않고 한일 신협약을 체결하여 통감정치를 강화해 나갔다. 이로써 통감은 한국의 내정에 일일이 간섭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이어 1907년 8월에 일본은 순종의 허락을 얻어 군대를 아주 해산해 버렸다. 그리고 이에 저항하는 군인들을 2시간여의 전투 속에서 진압하고 말았다. 

국내에서 들어오는 이러한 소식들은 재러동포들을 흥분시켰다. 특히 헤이그에서 들려온 이준의 사망 소식은 재러한인들을 더욱 격분시켰으며, 이에 한인들은 의병을 일으킬 준비를 전개하였던 것이다. 러시아지역에서 한인들의 의병활동은 동의회를 중심으로 추친되었다. 대표적인 의병장으로는 최재형, 이범윤, 이위종, 안중근, 홍범도 등을 들 수 있다. 그들의 의병활동은 국내진공활동으로 대변된다. 1908년 7월 7일 최재형이 이끄는 동의회와 이범윤이 이끄는 창의회의 동지 등 300여 명이 우영장 안중근, 좌영장 엄인섭 등의 지휘 하에 두만강 연안 신아산 부근 홍의동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경홍 군 수비대 병사 2명과 헌병 1명을 사살하였다. 또한 1908년 7월 9일 의병 200여 명은 두만강을 건넜고, 7월 10일 새벽 경홍 군 신아산을 습격하여 일본군 1명을 사살하였다. 그리고 회령수비대 200명과 여러 차례에 걸쳐 교전하였다. 이처럼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던 연해주 의병은 1908년 7월 19일 회령 영산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안중근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단지동맹을 결성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의지를 불태우기도 하였다.

 

- 계몽운동 

구한말의 계몽운동은 신문의 간행으로 대표된다. 해조신문과 대동공보가 그것이다. 

 해조신문은 1908년 2월 26일에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간된 교포신문으로 일간으로 간행되었다. 간행에 주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은 정순만과 최봉준이며, 특히 최봉준은 이 신문의 운영에 있어 재정적인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해조신문은 조선의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간행되었으며, 한글로 간행된 것이 하나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해조신문은 내용에 있어서 국권의 회복과 재러동포의 계몽에 비중을 두었다. 동포들의 교육, 풍속의 교정, 민족적 단결의 강조, 국내외의 의병활동 소개, 일제의 만행 비판 등이 그것이다. 반면 재러한인의 삶과 직결된 당면문제, 즉 러시아의 한인 배척 등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였다.

 이러한 해조신문은 통감부에 의한 국내에서의 계속적인 압수와 사장 최봉준에 대한 상업상의 압력, 러시아 당국의 한인독립운동세력에 대한 압박, 한국인들 사이의 갈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1908년 5월 26일에 75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고 말았다.

 대동공보는 구한말 일제의 조선침략이 더욱 노골화되던 시기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하고 있던 동포들에 의하여 구국운동의 일환으로 1908년 11월 18일 창간되어 1910년 9월 1일까지 약 2년 동안 간행된 한글 민족지였다. 이 신문의 종지는 동포의 사상을 계몽하여 문명한 곳으로 나아가게 하며 국가의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이었다.

 신문의 내용 중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국권회복, 러시아 지역 한인 사회에 대한 소식, 국내 소식, 러시아의 한인 배척과 재러한인의 대응 등에 관한 것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 특히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은 국권회복과 러시아의 한인 배척과 재러한인의 대응에 관한 것이다.

 재러한인의 권익과 조선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활발한 언론활동을 전개하던 대동공보는 일제의 요청에 따른 러시아 당국에 의해 1910년 9월 1일 폐간되고 말았다. 그러나 재러한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1910년대에 대양보, 권업신문, 대한인정교보 등의 교포 신문과 잡지 등을 계속 간행, 조국의 해방을 위한 언론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한편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점되자 상트리터스부르크에서는 연해주 지역의 항일운동을 지원하던 주러시아 이범진 공사가 목매 자결 순국하였다. 연해주 지역에서는 그를 추도하는 모임들이 잇달아 개최되었으며, 그 뒤 한인 민족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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