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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교포 러시아 한인 민족운동의 전개, 조직과 활동

by 다희올린 2024.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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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년대 재미교포 러시아한인의 민족운동 전개 

- 권업회의 조직과 활동

권업회는 1911년 12월 19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조직된 연해주 지녁 재러한인의 권익 옹호기관이자 옥립운동 단체였다. 지금까지 연해주 지녁 한인 전체를 대표하는 기구가 없었던 점을 상기해 볼 때 이 단체의 설립은 한인 독립운동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전에는 함경도파, 평안도파, 서울파 등으로 또는 토착세력, 외부이입세력 등으로 나누어져 각각 군소단체들이 난립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단체들은 일제의 조선 강점, 러시아의 대한인정책의 변화 등에 발맞추어 하나의 단체로 뭉치게 되었던 것이다. 

 권업회는 조국이 일제에 의하여 강점된 상황하에서 망국민에 의하여 해외에서 조직된 단체라는 기본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권업회는 그 설립과 활동, 해산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의 대한인정책의 강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업회는 자신의 주변 환경을 최대한 이용하며 재러한인의 권익옹호와 조국의 독립을 위한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농작지개척활동, 입적 청원활동 등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권업회는 재러한인의 권익옹호와 조국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였다. 그러므로 이를 추진하기 위하여 많은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권업신문의 발간은 권업회의 중점적인 사업이었다. 그 점은 권업회의 재정 지출 중 권업신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제일 높다는 사실을 통하여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결국 권업회와 권업신문은 모국이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점된 상황하에서 이국땅에서 살고 있는 동포들에 의해 조직된 단체이며 신문이라는 기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었다. 더구나 러시아의 대한인정책은 이들의 활동에 큰 영향력을 미쳤던 것이다. 이러한 주변 여건 속에서 권업회는 곤다찌 총독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재러동포들의 권익옹호와 계몽 등을 통한 지식의 발달, 민족의식의 고취 등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연해주 지역에서 재러한인들의 민족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러시아와 일본이 연합국이 됨으로써 쇠퇴하게 되었다. 그 후 권업회에서 활동한 인물들은 러시아 혁명 과정을 거치면서 이동휘, 김립, 최재형, 계봉우 등 대다수의 인물들이 대한국민의회, 한인사회당 등에 참여하여 혁명 이후 한인민족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의 조직과 활동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는 치따 지역에서 처음으로 조직된 한인의 대표기구이자 독립운동단체였다. 이 단체는 비록 대한인정교라고 하는 러시아정교를 이용하여 단체를 이끌어 나갔으나 사실상 독립운동 단체였다. 뿐만 아니라 이단체는 미주의 대한인국민회의 시베리아지방총회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즉 미주의 대한인국민회와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단체가 운영되었던 것이다.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는 공립협회 원동지부가 발전하여 조직된 국민회 원동지부를 바탕으로 1911년 10월 이강, 정재관 등 국민회계열의 인사들에 의하여 자바이깔주의 수부인 치따에서 조직되었다. 창립 당시 시베리아총회의 주요 간부는 회장 박집초, 부회장 태용서, 서기 탁공규, 극동전권위원 이강 등이었다. 

 그리고 관할 지역은 치따, 하바롭스크, 미영, 상우진 등 9개 지방회였으나 1913년에는 16개 지방회로, 1914년에는 21개 지방회로 그 세력이 확대되었다.

 대한인정교보는 1912년 1월 2일 러시아 치따에서 간행된 한글 잡지로 그 이름을 대한인정교보라고 하였다. 이 잡지는 러시아의 대한인국민회에 대한 부정적 인식 등으로 인하여 간행자가 러시아 정교 치따교구로 되어 있고, 그 명칭 또한 종교적인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으나 사실은 미주에 본부를 두고 있는 대한인국민회의 시베리아 지방총회 기관지였던 것이다. 정교 보는 창간 시에는 매월 1일 한차례 씩 간행할 예정이었으나 일본의 방해, 1차 세계대전의 발발 등으로 인하여 1914년 6월에 간행된 11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고 말았다.

 이처럼 치따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와 그 기관지 대한인정교보는 1914년 후반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그 세력이 위축되고 결국 1915년 5월 러시아에 의해 해체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뒤 치따 지역에서 전개된 혁명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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