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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독립운동의 전개, 러시아 지역 한인 독립운동

by 다희올린 2024.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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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혁명 이후의 독립운동과 3.1 운동의 전개 

노령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은 2월 25일 전로국내조선인대회를 개최하여 독립선언서 제작 및 선포에 관한 준비를 하는 가운데 3월 8일 유고로 러시아에 온 다수의 조선인들로부터 조선에서 3.1 운동이 발발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당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한민학교에서 개최된 기독청년회 석상에서 김하구는 국내에서의 만세소식을 설명하고,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며, 동포들에게 민족의식을 크게 고양시켰다. 

 국내에서의 만세운동 소식에 접한 대한국민의회에서는 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1919년 3월 17일 오전 9시경 다수의 조선인이 참가한 가운데 우수리스크 코리사코프가 거리에 있는 동흥학교 앞 광장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이에 놀란 일본 헌병대는 물론 수비대가 바로 취재를 러시아관헌에게 요청하여 그들이 공포 50발을 발사하여 오전 11시 20분경 참여한 군중들을 해상 시켰다. 아울러 이때 러시아 당국도 당시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조선이인 사범학교 학생 4명을 체포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우수리스크로부터 문창범이 오면서 적극적인 운동을 시작하였다. 3월 17일 조선인 2명이 한글과 러시아어로 된 독립선언서를 블라디보스토크 일본총영사관에 전달하였다. 그리고 오후 4시경 신한촌에서 학생등 다수의 조선인이 모여서 큰길에서 연설을 하고 독립 선언서를 배포하고 집집마다 국기를 게양하고 만세를 불렀다. 이에 일본 측이 러시아관헌에게 제재를 요구하자 학생들은 집회 장소를 신한촌에서 시내로 변경하였다. 학생들은 점차 어두워져 안면을 식별할 수 없는 틈을 타서 시중에서 자동차 3대, 마차 2대에 나누어 타고 가도를 달리며, 한국국기를 차위에서 흔들고 만세를 불렀다.

 한편 재러동포들은 시위운동을 전개하는 외에 3월 17일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11개국 영사관과 6개의 러시아 관청에도 선언서를 배포하였다. 러시아지역의 3.1 운동은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 외에 러시아 전 지역에서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 한인들은 러시아 혁명군과 힘을 합쳐 러시아 백군과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한인들이 전개한 대표적인 전투로서는 이만 전투, 올가 전투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대표적인 항일운동가로 김 스탄게베치, 한창걸, 이용, 김경천, 김규면, 최계립 등을 들 수 있다. 

 1922년 러시아 내전이 종결되자 러시아 혁명정보는 한인무장부대들을 해산하였다. 결국 이를 계기로 러시아지역에서의 항일운동은 막을 고하고 말았다. 

- 러시아 지역 한인독립운동의 역사적 성격

러시아 극동지역은 한반도와 두만강을 접하고 있는 지역으로서 한국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특히 두만강 건너 연해주 곳곳에는 발해의 유적지들이 널리 퍼져 있으며, 1860년대 이후 이곳에 거주하였던 한인들의 숨결이 남아 있다. 또한 구한말 이후 지속적으로 전개된 항일투쟁의 열기와 유적지들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했던 동포들이 다시 돌아와 재정 착하고 있으며, 구소련의 몰락 이후에는 많은 한국업체들이 진출하고 있다.

 러시아 극동지역은 1910년대 국내외에 걸쳐 민족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지역이다. 이 지역 민족운동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연해주에서는 1905년부터 1908년까지 두만강 대안인 연초 지역을 중심으로 의병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 대표적인 의병장으로는 이범윤, 최재형, 홍범도, 안중근 등을 들 수 있다. 재러동포들은 이들 의병장들을 중심으로 활발한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여 일본군에게 큰 위협을 가하였다. 특히 의병장의 한 사람인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를 포살함으로써 한국 독립운동의 활성화 및 국내외 동포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기여하였다.

 둘째,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을 중심으로 애국계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한민학교 등 민족학교를 설치하여 동포 자제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신문 등을 간행하여 국내외 소식전달과 항일의식 고취에 크게 기여하였다. 대표적인 신문으로는 '해조신문'과 '대동공보' 등을 들 수 있다.

 셋째, 1910년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점될 기미가 보이자 연해주 한인들은 유인석을 중심으로 13도의 군을 조직하여 국내로 진공 하여 일제를 몰아내고자 하였다. 아울러 성명회 선언서를 발표하여 일제의 조선강점의 부당성을 전 세계에 선포하여 한국의 독립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넷째, 1911년 연해주 한인들은 한인자치기구로서 권업회를 조직하여 한인들의 자치활동과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아울러 신채호, 이상설, 장도빈 등을 주필로 하는 권업신문도 간행하여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또한 이동휘 등을 중심으로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 일제에 대항하여 한국의 독립을 당성하 고자 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함으로써 재러한인들의 이러한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다섯째, 러시아지역의 한인들은 1919년 2월 25일 국내외에서 최초로 대한국민의회라는 정부를 조직하였다. 대한국민희회에서는 문창범, 이동휘, 최재형, 김철훈 등이 중심인물로서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만주, 국내 등지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상해임시정부와도 통합을 이룩함으로써 발전적으로 해체하여 민족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러시아 극동지역에서는 1905년부터 1922년 러시아 내전이 종결되는 시기까지 동포들의 지원하에 도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크게 기여하여 민족운동 발전에 공헌하였다. 그런데 1922년 러시아 내전이 종결된 이후 연해주 지역에서는 소련의 대한이정책의 변화로 인하여  더 이상 독립운동이 전개될 수 없었으며, 1937년에는 일본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18만 동포가 중앙아시아로 이주당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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