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희 대통령 암살 사건 배경
한국 현대사의 중추적인 인물인 박정희는 1963년부터 1979년 암살될 때까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그의 리더십은 경제 발전과 산업화, 확고한 권위주의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 임기동안 논란과 반대가 없지는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 궁정동 암살사건 또는 10. 26 사건이라 부르는 이 사건은 1979년 10월 26일에 대한민국의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박선호, 박흥주 및 안가 경비원들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고, 차지철 경호실장, 정인형 대통령 경호처장, 안재송 대통령 경호부처장, 김용섭 대통령 경호관, 김용태 대통령 경호실 차랑 운행계장 등을 살해한 사건이다.
김재규의 행동 이면에는 복잡한 동기가 있었으며 개인적 불만과 정치적 불만이 복합적으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재규는 "내가 안하면 틀림없이 부마 민주 항쟁이 5대 도시로 확대되어 4.19 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라고 판단했다. 그는 박정희의 충성스러운 사람이었으나 박정희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통치 방법과 정부 내부의 부패 인식에 환멸을 느꼈다고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서 암살했다고 주장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과 KBS 당진 송신소 개소식에 참석한 후 궁정동 안가에서 경호실장 차지절, 비서실장 김계원, 중앙정보붑장 김재규와 함께 연회를 가졌다. 연회 중에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에 가슴과 머리를 맞았고. 공 국군 서울 지구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이송 중 사망하였다. 당시 박정희의 나이는 만 62세였다.
- 암살 사건의 과정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집무실에서 주요 엄무보고와 결재를 마친 뒤 오전 10시 27분 경호실에서 준비해놓은 헬리콥터에 탑승하여 오전 11시경 삽교천 방조제 준공행사에 참석한 뒤 낮 12시 10분 다음 일정지 대북용 KBS 당진 송신소 보강공사 준공식에 도착하였다. 오후 4시 10분경 정보부 남산분청 본인 사무실에 있던 김재규 정보부장은 차지철 경호실장으로부터 오후 6시에 대통령을 모시고 서울 종로구 궁정동 청와대 부지 내에 있는 중앙정보부 소속의 안가에서 만찬이 있을 것이라는 전화 연락을 받았다. 차지철의 통보를 받은 김재규는 미리 궁정동 안가에 도착하여 총에 실탄을 장전하고 서가 뒤에 숨겨 놓았다. 저녁 6시 5분 즈음 도착한 박정희와 차지철이 궁정동 안가로 들어오고 김계원과 김재규도 연회장이 있는 '나'동으로 들어갔다. 김재규는 총을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숨긴 채 박정희와 대면하였다. 그렇게 박정희는 김재규, 차지철, 김계원, 심수봉, 신재순과 함께 술을 겸한 저녁 식사를 하였고 연회장에서 심수봉의 노래가 끝나고 신재순이 노래를 부르던 중 김재규가 차지철과 박정희에게 총을 쏘았다.
- 암살사건 이후
피의자 신문조서 내용 중에 대통령만을 제거하고 현장에서 자살하거나 외국으로 망명할 수도 있지 않았냐는 질문에 김재규는 "본인이 살아남아야만 대통령 제거 이후의 혼란된 정국의 주도권을 잡아 뒷설거지를 하고 본인의 구상대로 통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암살 사건 이후 계엄령이 선포 되었고, 대한민국은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한 시기를 맞이하였다. 박정희 사망 직후 군부와 정부 내에 권력 다툼이 일어났고, 전두환 장군이 10.26 사건 수사를 하기 위해 설치된 합동수사본부장에 오르면서 핵심 인물로 등장하여 집권까지 하였다. 결국 1979년 12월 12일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승화를 신속히 체포하고 군부를 장악 하였다.장악하였다. 신군부 세력은 국회의사당 폐지로 민주화 여론을 탄압하고 5.17 쿠데타를 일으켜 계엄군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공식으로 진압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평가
-긍정적 평가
박정희 암살 이후 한국은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궁극적으로 대한민국에 보다 민주적인 정부가 탄생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부정적 평가
박정희 암살은 대한민국에 보다 민주적인 정부를 탄생시켰지만 동시에 정치적 불확실성과 불안의 시기를 가져왔다. 정치적 암살이 폭력 문화를 조장하고 안정적인 정치 시스템의 발전을 방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무력을 사용한 변화의 방법은 민주적인 과정이 아닌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