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택시 운전사'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전 이야기
1979년 10월 26일 갬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했습니다. 이 일을 영화로 만든 것이 '남산의 부장들'이었습니다. 나라의 권력 핵심인물 원, 투, 쓰리가 한 번에 사라졌으니 당연히 다음 순서는 계엄령의 선포였습니다. 계엄령이 선포되니 군인들의 세상이 찾아왔고,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은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전두환은 실권을 장악했지만 독재정권 박정희가 물러가고 민주주의가 펼쳐질 거라 희망했던 시민들은 군부정권의 지배를 받을 생각이 없었고 이를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2017년 8월 2일 개봉한 영화 '택시운전사'로 알려졌고 많은 사람들이 다시 한번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관심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군사진압
1980년 광주에서 촉발된 5.18 민주화 운동은 전두환 군사정권에 맞서는 국민들의 항쟁이었습니다. 시민 시위에서 탄생하고 잔혹한 탄압을 겪은 이 사건은 회복력과 변화를 상징하며 한국이 민주주의를 향한 길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은 광주항쟁 또는 광주 민주화운동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1979년 12월 전두환이 주도한 군사 쿠데타로 싹텄던 광주 민주화 항쟁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이 운동은 군정의 탄압 정책에 대응하여 나타났습니다. 전두환은 1980년 5월 17일 북한이 곧 쳐들어 올 것 같다는 명분으로 비상계엄 확대조치를 실시하였습니다. 이 조치로 모든 정치활동이 금지되었고, 언론은 물론 출판이 사전검열 되었으며 대학교는 휴교령이 내려졌고, 학교들마다 총을 든 군인들이 지키고 서있었습니다. 예비검속으로 학생, 정치인, 재야인사 등이 구금되었고 1980년 5월 18일 새벽 무장 군인들이 전남대와 조선대 학생들을 연행하였고, 결국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는 계엄령과 휴교령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이 시위를 벌였습니다. 5월 18일 오전 10시 특수부대인 7 공수여단이 투입되어 곤봉으로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군인들의 무력 진압이 시작되자 학생들은 금남로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소식을 들은 광주 시민들이 함께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5월 19일 오전 공수부대는 학생과 시민 구분 없이 시내 한복판에서 무자비한 폭행을 시작했으며 군인들은 살상용 몽둥이와 화염방사기까지 가지고 가는 모습이 자료화면으로 남아있습니다. 5월 19일부터 계엄군인들은 대검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5월 20일부터는 시민들에게 총을 발포하기 시작했습니다. 군인들이 총을 쏘기 시작하자 시민들이 계염군의 보급로 차단을 위해 광주역을 사수하려고 광주역으로 몰렸고 몰려드는 시민들을 향해 군대는 집단발포를 했습니다. 많은 택시 기사와 버스 기사들이 자신들의 생계수단이자 전재산인 차를 방패로 기꺼이 내놓으며 시민들을 보호했습니다. 무력 진압의 과정에 사상자가 발생했고 눈앞에서 시신을 목격한 시민들은 더욱 분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위하는 시민들을 군인들이 조준사격 하였고, 5월 21일 군인들의 집단발포로 최소 50명이 사망하고 500명 이상의 부상자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후 시민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군인들은 탱크까지 동원하였고 5월 27일 광주 도청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군인의 총에 맞아 숨졌습니다.
-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
광주에서 일어난 일을 아무도 보도하지 못하게 막고, 빨갱이들이 일으킨 폭동이라고 속인 전두환은 1980년 9월 대통령에 취임을 하였고 시간이 흘러 이들이 한 짓이 밝혀지며 청문회가 열렸지만 소환된 당시 신군부 수뇌부들은 당시 군인들은 스스로 지키기 위해 총을 쏜 것이라며 정당방위를 주장하며 뻔뻔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수많은 시민을 학살당하게 한 당사자 전두환은 죽는 날까지 반성도 사과도 없었습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직접적인 영향력을 넘어, 도시의 경계를 넘어 울려 퍼지는 권위주의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광주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은 한국 전역에 걸쳐 더 광범위한 민주화 운동을 활성화시키는 촉매 역할을 했습니다. 시민들의 용기 있는 저항의 울림은 온 나라에 울려 퍼지며 정치사의 흐름을 좌우했습니다. 이 운동의 상징적 의미는 광주에서 이루어진 가시적인 시위와 희생뿐 아니라 더 폭넓은 체제 변화를 위한 촉매제로서 그 지속적인 유산에 있습니다. 이 운동이 낳은 추진력은 한국의 정치 지형을 형성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고, 궁긍적으로는 민주선거의 도래에 기여했습니다. 이는 억압에 맞서는 집단적 행동의 힘을 보여주며 다음 세대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