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기 식민지시기 인구 변화 추세 (1910-1945)
일본인 인구 - 일제 말기에 약 70만. 1910년대 초에 가장 많이 이주. 1919,1920년 콜레라 유행기에 저조. 이후 거의 비슷한 수의 일본인이 조선에 이주.
조선인의 직업별 인구 구성은 1910년대만 해도 농업이 85%로 압도적이며, 상업, 교통업이 뒤를 이었다. 타 직업은 극히 미미 하였지만 1942년에는 농업이 68%로 줄어들고, 상업, 교통업이 8% , 광업이 2%를 차지하였다. 기타도 3%에서 9%로 늘어났다. 이는 1930년대 이후의 공업화의 진전에 따른 결과이다.
일본인 인구의 직업구성을 보면, 1917년과 비교할 때 1942년에는 공무자유업이 13%가량 증가했으며 전체적으로도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상업, 교통업은 1917년 약 29%에서 1942년 약 25%로 약간 줄어들었다. 농업 인구도 11%대에서 3%대로 크게 줄었다. 일본인의 농업 이민정책은 사실상 실패한 것이다. 대신 공업과 광업 인구가 약 13%에서 약 21%로 늘었다. 이는 조선의 산업화에 따른 결과 일 것이다. 공무자유업이란 총독부, 관공리, 금융조합 등 공공기관 근무자, 경찰, 교사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일본의 식민지 조선 지배가 직접적인 지배였기 때문에 이 숫자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인 지주들의 경작 면적은 모두 25만 7,268 정보이며, 전 소유지 면적은 약 41만 8,480 정보에 달한다. 이외에도 동척의 경영전답 9만 6338 정보, 소유지 13만 3,800여 정보, 관리지 2만 7,414 정보가 따로 있다.
조선농업에 투자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일본인 경영회사는 조선 내에 본점을 둔 회사만 57개 사가 있고, 조선 외에 본점을 두고 조선 내에 지점을 둔 회사는 총 20개 사가 있다. 77개사의 출자 또는 공칭 자본은 1억 1,518만 2400이요, 출자 또는 불입자본은 1억 8,411만 5,950이다. 이 거대한 농업자본은 대부분 농사경영, 비료, 농구판매, 미간지게 간, 토지개량, 농산물 생산 판매, 수리사업, 토지가옥 임대차 또는 매매, 창고업, 조림, 양잠, 면화, 과수 종묘재배 등 영리 사업에 투자됨과 동시에 부동산 및 유가증권 등을 담보로 하여 산업자본을 대출하는 등 금융자본의 활동을 하고 있다.
-일본인의 토지 소유에 대해
초기의 일인 내주자로서 조선의 토지를 침탈한 자는 고리대금업자, 부랑배, 투기상인 등 갖가지의 악당들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한국흥업이니 한국척식, 일한임업, 한국실업, 한국권업 등과 같은 주식회사도 20개를 헤었다. 이들 회사는 그 본점을 혹은 일본 본토에 두고 또 혹은 조선 내에 두고 있어서 자본은 불입이 최소가 3-4만 원, 최대는 6-70만 원에 달하는 것들이었다. 농업 경영과 아울러서 그들은 고리대금업, 곡물 매입, 창고업, 토지매매, 토지매수 등을 겸행해 왔다.
일본인은 조선농민의 무지와 또 그 요행심 등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고리대적 방법 기타의 온갖 악랄한 수단으로써 토지를 매득하였다. 또 한 가지 특징은 그들은 주로 남조선의 비옥한 곡창지대를 목표로 하여 토지약탈을 강행하여 왔다. 그들은 북조선의 고원지대나 산악지대와 같은 척박한 곳은 돌아보지 않고 주로 비옥한 지대만을 골라 약탈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리하여 1910년 12월 말에는 벌써 일본인의 소유지가 8만 6,952 정보를 헤아리게 되었는데, 그 대부분은 남조선의 도작지대에 분포되어 있었다.
- 산미증식계획과 쌀 생산량, 쌀 수출 및 소비량의 문제
'조선총독부통계연보'에 의하면, 산미증식계획이 시작되기 전인 1915-19년 평균 쌀 생산량은 1,393만 여석이었고, 1930-1935년도 평균 쌀 생산량은 1,765만 여석이었다. 평균 약 372만 석이 증가한 것이다. 반면에 쌀 수출은 220만 여석에서 782 맘 여석으로 약 562만 석이 늘었다.
산미증식계획 후 일본으로 쌀이 얼마나 실려 갔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그동안의 교과서들이나 2008년 출간된 교과서 포럼의 대안교과서는 모두 증산량이 얼마이며, 그 가운데 얼마나 일본으로 더 실려 나갔는가 하는 수출 증가분의 절대 액수를 가지고 말해왔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방식에는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산미증식계획 이전에 실려 간 쌀은 언급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문제는 차라리 절대 생산량 가운데 수출량이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했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여겨진다.
- 공업과 노동자
식민지 조선의 공업은 10개 분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방직공업, 금속공업, 기계기구공업, 요업, 화학공업, 제재 및 목재공업, 인쇄 및 제본 공업, 식료품 공업, 가스 및 전기공업, 기타 등이다.
일제가 조선을 병탄 한 직후 채택한 산업정책은 조선을 순수 농업지대로 묶어 두려는 것이었다. 회사령으로 조선에서 근대적 대공업이 발흥하는 것을 억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1916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에 따른 호황기가 도래하면서 조선의 공업발전을 억제하려는 조선총독부의 규제는 한결 느슨해지는 한편, 기업설립 활동은 활발해졌다. 그 결과 회사령은 공식적으로는 1920년에 철폐되지만 1916년부터 사실상 무의미한 것으로 되어버린다. 그 후 1920년대 말까지는 조선 총독부가 공업발달을 세우는 정책을 세우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뚜렷이 공업개발을 중시하는 산업정책을 세웠던 것도 아니다. 이 시기의 산업정책은 산미증식계획을 중심으로 하는 농업 부문에 놓여 있었다. 더구나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의 반동공황, 1923년의 관동대지진, 1927년 금융공황, 1929년의 세계대공황 등으로 인해 1920년대는 만성적 불황기였기 때문에 근대적 공업의 발달은 거의 정체되었다. 따라서 1920년대의 조선의 공업은 주로 영세중소자본의 속출을 특징으로 하게 되고 조선 내에서 근대적 공업의 발달은 미미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부터 새로운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30년대 이후 조선의 대표적인 재벌로 성장하는 일본질소비료의 조선진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