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통치시대 교육
식민지 시기 보통학교 취학률의 변동은 4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기는 1912년부터 1919년까지로 취학률이 정체되어 있는 시기이다. 이 시기는 조선인의 교육에 대한 태도가 보통학교에 대학 저항과 서당교육 지향으로 특징 지워진다.
제2기는 1920년부터 1923년까지로 취학률이 급격하게 상승하는 시기이다. 3.1 운동 이후 총독부가 이른바 3면 1 교제를 앞당겨 실시한 시기와 일치한다. 1922년까지 전국적으로 3면에 1개교씩 학교가 세워졌기 때문에 취학기회가 늘어난 것이다. 제3기는 1924년부터 1931년까지 이다. 이 시기의 취학률의 상승추세는 주춤한다. 이 시기는 다시 그 안에서 두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 번째는 1924년부터 1928년까지로 총독부가 3면 1 교제를 완성한 이후 특별한 보통학교 증설 계획을 세우지 않은 시기이다. 두 번째는 1929년부터 1931년까지로 이 시기는 '1면 1 교제' 실시의 초기이다. 하지만 1929년 세계공황의 여파로 농촌경제가 극도로 피폐 해졌고, 이로 인해 취학률은 크게 늘지 않았다. 제4기는 1932년 이후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취학률이 비약적으로 상승하였다. 1면 1 교제의 완성과 그에 이은 2차 계획의 실시, 2차 계획의 단축 실시 등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또 이 시기에는 조선 인들에 의해서도 보통학교 설립운동이 크게 일어나 학교 신설, 학급 증설 등이 이루어진 시기 이기도 하다. 취학률 추이에서 두드러진 것은 남자와 여자 취학률의 차이이다. 1920년 여자의 취학률은 1.2%였고, 남자의 취학률은 7.4%로 여자의 6배였다. 1930년에는 여자가 6.2%, 남자가 28%로 여자의 4.5배였다. 1940년에는 여자가 22.2%, 남자가 60.8%로 약 2.7배였다.
1920년대 이후 보통학교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보통학교 졸업자수도 그 상승폭이 완만하나마 꾸준히 늘어났다. 하지만 고등보통학교의 숫자는 거의 늘어나지 않았다. 1920년 보통학교가 641개교이던 것이 1935년 2,274개교로 늘어난 데 반해 고등보통학교는 1920년 23개교에서 1935년 45개교로 늘어나는데 그쳤던 것이다. 이에 따라 보통학교 졸업생들의 고등보통학교 진학률도 크게 낮아졌다. 1920년 28.6%, 1923년 18.6%, 1926년 10.0%, 1935년 5.8%로 진학률은 갈수록 낮아졌다. 때문에 상당수의 보통학교 졸업생들이 중등학교 진학을 위해 일본으로 대거 유학을 떠났다.
- 일본 통치시대 의료. 위생
1931년 종합병원은 사립이 83개, 공립이 46개로 모두 129개가 있었다. 이는 인구 17만 명 당 1개 꼴이었다. 의사 1인당 인구수는 1933년 당시 의사 1인당 인구가 11,322명 수준으로 의사가 극히 희박한 상태에 있었다고 할 수 있고, 그나마 대부분 도시 지역에 있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조선인은 한방의 진료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1931년 말 조선인 의사는 939명이며, 일본인 의사는 816명이고, 외국인 의사는 34명이었다. 그런데 의료기관 가운데 가장 크고 또 가장 많은 환자를 접촉하는 관공청 의사 총수 403명 가운데 일본인 의사가 303명을 차지하고 있었고, 조선인 의사는 100명에 불과하였다. 치과의사도 조선인 관공청 의사는 겨우 4명이고, 일본인 관공청 의사는 26명이며, 개업 치과의사를 보아도 일본인은 248명 조선인은 138명으로 일본인이 110명이나 많았다.
1931년 말 한의사 수는 4472명으로, 일본인 및 외국인은 한 명도 없었다. 진찰료가 없고, 약 값이 싸기 때문에 손쉽게 진찰받을 수 있다는 장점으로 조선 인들은 대부분 희생을 찾고 있었다.
1931년 산파 수를 보면 일본인은 산파가 69명, 기타 996명으로 합계 1065명의 다수에 달하나, 조선인은 관공청 13명, 기타 207명, 합계 233명에 불과하여 일반 조선인 출산을 맡을 산파는 극히 소수임을 알 수 있다. 일본의 경우네는 산파가 면, 동까지 분포되어 있으나 조선에서는 인구 3천 명당 1명 꼴로 산파가 있는 셈이었다. 또 산파의 요금은 매우 비싸 극소수의 사람들만 이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인 임산부 사망률은 여자 1000명 사망에 대해 19명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는 일본의 10명 수준에 비하면 거의 2배에 달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