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식민지 시기 철도
조선 철도의 현황
1899년 경인철도 개통 당시 선로 연장은 30km에 불과했으나 1930년 12월에는 2,770km로 31년 만에 거의 100배에 달하였다. 식민지 시기 국유철도의 영업 km는 1910년과 비교할 때, 1944년에 4.62배, 정거장 수는 1910년과 비교하여 1942년에 6.7배, 종업원 수는 1910년과 비교하면 1944년에 8.8배가 늘었다.
한편 사설 철도는 1910년대의 경 편철도 부설 붐에 의해 시작되어 1차 대전기의 호황으로 박차가 가해졌다. 1914년 조선 총독부는 교부금 제도를 설치했고, 1921년 일본 정부는 '조선 사설 철도 보조법'을 공포하는 등 조선 내 사철의 보호육성에 노력했다. 그리하여 사철의 노선망도 급속히 확대되었다. 영업 km는 1942년에 55.7배, 정거장 수는 1938년에 61.6배가 늘었다.
조선 철도의 여객, 화물의 운수 성과는 1910년대 초에는 완만한 증가 추세를 보였다. 1차 대전에 의해 경기가 호황을 누리면서 여객과 화물의 운수 성적도 점차 늘어났다. 1차 대전 이후 만주사변에 이르기까지 경제는 대체로 불경기였지만 여객과 화물은 꾸준히 늘어났다. 1930년 초반 세계공황의 여파로 철도 여객과 화물 운송은 침체기에 빠졌다. 그러나 3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만주로의 조선 농민이주와 만주시장의 활성화에 따라 여객과 화물 운송이 본격적으로 늘어났다. 또 경기의 활성화에 따라 관광객, 여행객도 크게 늘어났다. 1910년에 비하면 1940년 여객 운송은 40 여배, 화물 운송은 20 여배 늘어나, 여객 운송이 더 크게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여객이나 화물 모두 1937년 중일전쟁 이후 크게 늘어난 점이 주목된다. 이는 중국이나 만주로의 전쟁수행을 위한 인력과 물자 수송이 크게 늘어났음을 말해준다.
- 조선 철도의 경제적 의의 : 철도는 자본주의의 강철제 혈관이라 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적 국가 경제나 개인 경제는 이를 통해서 그 발전 요소를 가장 많이 흡수할 수 있기 때문에 철도와 자본주의는 거의 같이 성장했다. 철도는 농촌에 상품과 화폐를 운반하고, 도시에 원료와 노동과 이윤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더욱 발전시키는데 가장 효과적인 역할을 하며, 또 선진국은 철도로써 후진국에 막대한 금리와 이권을 거둬들이고 그곳을 자본 주의화 시킴으로써 자국의 금융자본과 상품 수출의 판로를 개척 확장 하였다.
- 철도 부설의 정치적 의의 : 현대국가의 중앙 집권적 통치에는 영토의 철저한 거리 축소가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행정사무와 경찰사무의 신속화는 '문명국'의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또 선진국은 철도를 후진으로 가지고 들어가 정치적 교섭의 첫 막을 열고, 그것을 점차로 발전시켜 동국에 대한 정치적 간섭을 시도한다.
- 철도 부설의 군사적 의의 : 모든 철도를 평상시와 전시로 나누어 본다면 평상시에는 모두 산업철도요, 전시에는 모두 군사철도가 아닌 것이 없었다. 이는 자본주의의 산업관계와 그 전쟁관계가 시간적으로 연쇄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까닭이었다. 그러나 지리적 특수 관계에서 어떤 것은 산업선이라 하며, 어떤 것은 군사선이라 부르는 바, 이는 시간적, 전체적으로 보아 엄밀한 구분이 아닌 것은 물론이다. 따라서 비록 산업 철도라 명명된 것일지라도 일면으로는 전부 군사철도의 기능을 가지는 것이었다.
- 일본식민지 시기 도시
일제 강점기에는 여러 지역의 여러 도시가 일제의 지배를 받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이다. 한국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이 기간 동안 일본 정부는 한국을 일본 제국에 동화시키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시행했고, 서울은 도시 개발, 인프라, 행정 측면에서 큰 변화를 겪었다.
일본 식민 당국은 근대 제국 도시에 대한 비전을 반영하기 위해 서울을 현대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들은 새로운 도시 계획 개념을 도입하고 현대식 건물을 건설했으며 일본 문화와 언어를 홍보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시행했다. 이 시기는 서울의 사회경제적, 문화적 지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일본 식민 지배의 영향은 지역마다 달랐고, 이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경험도 다양했다는 점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본 식민통치의 유산은 여전히 이 지역의 역사적 서사의 중요한 측면이며, 현대 관계를 계속 형성하고 있다.
1930년대 초 전국 5대 도시의 공장 총수는 1,477개이며, 종업자 수는 37,214명이었다. 생산액은 133,990,109원이었는데, 이는 공장수에서는 동년도 전 조선 공장 총수의 약 23%, 종업자와 생산액에서는 약 42%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경성은 상공업자보다 공무 및 자유업 종사자가 약간 많았고, 나머지 4개 도시는 모두 상공업자가 30~49%로 단연 수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5대 도시 전체의 합계는 상공업 종사자가 36%로 1위 이고, 기타 유업자가 26%로 2위, 공무 및 자유업이 25%로 3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도시의 발달은 한편에서는 놀랄만한 생산력의 증대, 거대한 부의 축적, 과학기술의 경이적인 진보, 각종 문물제도의 획기적인 변화, 사회시설의 정비, 생활편리의 향상 등을 보여준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실업자와 빈민의 증가, 계급갈등의 격화, 보건위생의 문제, 범죄율의 증가, 주택난, 상하도 문제 등 어두운 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가운데 식민지 시기 조선의 도시들이 안고 있었던 빈민과 실업자의 문제는 경성은 빈민이 34,093명, 평양은 15,650명, 부산은 11,030명, 대구는 50,523명, 인천은 4903명으로 총수는 11만 6199명에 달하였다. 이는 5대 도시 총인구수 83만 9,222명의 13%에 달하는 숫자였다. 이들 빈민 가운데 조선인은 11만 2,276명으로 빈민 총수의 96%를 차지하였다. 그런데 도시는 빈민을 도시 외곽으로 계속해서 배출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어, 당시 도시 외곽에 있으면서 행정구역 상으로는 도시에 포함되지 않았던 지역의 빈민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빈민 가운데 상당수는 집이 없어 노숙인으로서 생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