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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대통령 당선, 야간 통행 금지, 이산가족 찾기 TV생방송

by 다희올린 2024. 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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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 전두환 당선

전두환 대통령의 당선에 대하여 알아보며 한국 역사의 중요한 순간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치적 격변과 군사 통치를 배경으로 전두환의 권력 장악은 국가의 궤적에서 중요한 장을 열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은 온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와 사회 각계각층의 추대로 헌법에 따라 1981년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전개되었습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암살 이후 한국은 불확실성과 군부 내 권력투쟁의 시기를 맞이했고, 전두환은 이런 혼란 속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로 떠오르며 결국 치열한 선거 과정을 거쳐 대통령 직에 올랐습니다. 1980년 전두환의 대통령 당선은 한국 정치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부정선거 의혹과 시위 속에서 전두환은 취임해 자신의 권위를 공고히 하고 새로운 통치시대를 열었습니다. 그의 대통령 임기는 경제적 진보와 정치적 억압으로 특징지어졌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한국을 형성하는 복잡한 유산을 남겼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의 당선은 한국 역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고, 앞으로 수십 년 동안 한국의 정치 지형을 형성했습니다. 그의 대통령 임기는 경제성장과 현대화를 특징으로 하는 반면, 5.18 광주민주항쟁과 같은 민주화 운동에 대한 잔혹한 탄압을 포함한 논란으로 인해 훼손되기도 했습니다. 전두환의 유산은 한국의 진보와 민주주의 원칙 사이의 미묘한 균형을 강조하며 여전히 논쟁과 성찰의 주제로 남아있습니다.

-야간 통행금지

야간 통행금지는 전근대사회 여러 나라에서 대부분 실시되었던 제도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에도 실시된 적이 있었습니다. 전근대사회의 야간 통행금지 제도는 치안상의 필요가 주된 이유였습니다. 전등이 발명, 보급되기 전 등불 밑에서의 생산활동은 물론 구매와 위락등 일체의 활동이 제약받을 수밖에 없었으므로, 사실상 도시주민들의 밤 시간은 휴식 내지는 잠자는 시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광복 후의 야간 통행금지 제도는 미군이 진주한 직후인 1945년 9월 8일부터 시작되었으며, 미국 제24군 사령관의 '일반명령'에 의하여 경성, 인천 두 지역에 밤 8시부터 아침 5시까지의 통행금지령을 발포한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이어 9월 29일에는 일반명령을 개정한 야간 통행금지령을 발포하여 '미국 육군이 점령한 조선지역 내 인민'에게 밤 10부터 새벽 4시까지 야간 통행금지가 포고되었습니다. 이 군정법령이 대한민국 건국 후에도 계승되어 치안 상황에 따라 시작 시간이 밤 11시로 단축되기도 하였고 경우에 따라서 밤 8시부터나 10시부터로 연장되면서 지켜져 왔습니다. 통행금지 제도는 한국전쟁 이후 전국으로 확대되어 계속되다가 1954년 4월 1일 야간 통행금지 위반자가 구류 또는 과태료에 처하게 되면서부터 법령에 의해 제도화되었습니다. 이 제도의 전면 해제 건의안이 국회 내무위원회에서 가결된 것은 1981년 12월 10일이었고, 1982년 1월 5일 국무회의에서 경기도 강원도 두 도안의 휴전선 접적지역과 해안선을 낀 면부들을 제외한 전국 일원의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되었습니다. 1983년 12월 30일 자로 이 법이 전면 개정되었을 때도 '야간통행 제한 위반'이라 하여 그대로 존속되었고, 이 제도가 뚜렷한 근거 법령 없이 존속되어 온 것은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항상 준전시상태에 있다는 국민 간의 암묵의 양해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988년 1월 1일에는 제외되었던 나머지 지역도 통금이 모두 해제되었습니다. 통행금지 제도라는 강제된 국가적 시간규율은 한국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속도전, 빨리빨리 문화, 속전속결주의 등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됩니다.

- 1983년 이산가족 찾기 TV생방송

KBS1에서 1983년 6월 30일부터 11월 14일까지 138일 동안 방송했던 TV프로그램으로 단일 생방송 프로그램으로는 세계 최장 기간 연속 생방송 기록을 갖고 있는 프로그램입니다. 요즘 이산가족이라고 하면 남북으로 갈라진 가족들만을 일반적으로 떠올리기 때문에 남북 이산가족 상봉과 헷갈리기 쉽지만 이 프로그램은 남한 국내와 해외의 이산가족들을 서로 만나게 해 주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이산가족들은 주로 일제의 징용, 징병이나 생계를 위해 해외에 나가 있던 동포들이 해방 이후 귀국길에 오르고 6.25 전쟁 중의 피난길을 겪으며 난리 통에 헤어진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전쟁의 참화를 피해서 강제적인 민족대이동이 이루어지면서 온갖 종류의 이산가족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들은 피난을 떠나며 사람 무리에 휩쓸리거나 공습이나 포격을 피해 각자 달아나거나 하는 갖가지 사연으로 서로 헤어지게 되었고, 전쟁 통에 서로 소식을 전할 방방법이 없어 이산가족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출가외인 개념이 강하던 시대라 딸이나 누이가 시집을 가면서 친정과 연락이 끊어지거나, 입을 덜고자 친척이나 남의 집에 양자, 식모를 보내거나 고아원에 보내는 일이 많았기에 생방송에서도 다양한 이유로 자신이나 가족의 이름조차 모르는 사례가 많이 나왔습니다. 온갖 사연으로 헤어진 이산가족들이 당시 한국에는 넘쳐나고 있었지만, 1980년대 초의 한국은 인터넷은커녕 전화보급망조차도 원활하지 못했던 시대였는데 분단과 그리움 속에서 이산가족 찾기 생중계는 희망을 등불로 떠올랐습니다. 한국 방송사가 주최한 이 프로그램은 수십 년 동안 헤어진 사람들을 재결합시키고, 그들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실종된 사랑하는 사람을 찾을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방송되었습니다. 전국 각지의 가족들이 텔레비전 주위에 모여 친숙한 얼굴을 잠깐 보거나 오랫동안 헤어진 친척의 소식을 들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습니다. 방송은 각자의 사연을 나누는 등 기대감과 설렘이 교차하며 진행되었습니다.

방송이 진행되면서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펼쳐지기 시작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헤어진 가족들이 얼어붙은 청중들 앞에서 재회했으며 오랫동안 헤어진 친척들이 서로를 껴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들의 감정적인 재회는 가족의 지속적인 유대와 인간 정신의 회복력을 강력히 일깨워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1983년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은 한국 역사의 가슴 아픈 장면으로 남아 있으며, 연결을 강화하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변화를 촉진하는 텔레비전의 힘을 입증하였습니다. 이는 가족의 지속적인 유대와 역경에 맞서는 인간 정신의 회복력을 일깨워 주었으며, 전쟁의 상처가 치유될 수 있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제시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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