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립운동
20세기 전반기는 우리 민족의 반만년 역사에서 최대의 시련기였다. 명치유신 이후 강력한 군국주의를 표방한 일제가 우월한 군사력을 앞세워 대륙팽창정책을 추진하며 대한침략을 해왔기 때문이다. 일제는 강화도조약으로 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한 이래 청나라와 러시아 세력을 차단하기 위해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연이어 도발하며 대한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로 우리나라는 결국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이러한 일제 침략과 지배를 결코 좌시하지 않았다. 일본으로부터 국가와 민족을 수호하기 위해 처절한 투쟁을 벌였던 것이다. 의병 전쟁을 비롯하여 개화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정치사회단체의 계몽운동, 교육 언론활동, 산업진흥을 통해 실력양성운동 등 이 시기에 다양한 형태로 추진된 국권회복운동이 그것이었다.
독립 운동의 주체는 한민족이었으며, 소수의 친일 반민족 세력을 제외한 다양한 계층의 민족 구성원들은 여러 형태의 이념과 전략으로 세력을 결집하고 단체를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해나갔다. 독립운동의 무대는 국내뿐만 아니라 한민족이 한인사회를 형성하여 세력화하고 있던 중국과 러시아, 일본, 아프리카, 동남아와 남미 일부, 오세아니아를 제외한 거의 전 세계에 걸쳐 있었다. 독립운동이 추구한 절대적인 가치는 민족의 독립이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이 이것만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다. 식민지 상태를 청산하고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고 있었다. 한국독립운동의 경우 일제에게 빼앗긴 국토와 주권을 회복하고, 일제의 식민통치 권력과 구조를 완전히 구축하여 한민족의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최종의 목표였던 것이다.
-독립운동의 시작
독립운동은 의병전쟁, 계몽운동과 같은 구국투쟁에서부터 비롯되었다. 1910년 일제에게 국권을 강탈당한 채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부터는 식민지 해방운동으로서 독립운동이 전재되었고, 1945년 8월 해방이 되면서 독립운동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 반식민지 상태에서 개시된 독립운동은 1945년 해방 때까지 51년간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한민족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일제에게 국토와 주권을 빼앗기고 신민지지배를 받게 되었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는 한민족 전체에 국권상실의 고통을 준 것뿐만 아니라 민족의 생존과 존립 자체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민족이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민족적 과제는 민족의 자주권과 생존권을 확보하는 것이었고, 일제에게 빼앗긴 국토와 주권을 완전히 되찾아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일제의 식민지지배라는 조건하에 한민족이 해결해야 할 최대 과제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각계각층에서 독립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독립운동의 방법
독립운동은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되었다. 그중 독립운동의 핵심을 이루고 있던 것은 독립전쟁론 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독립전쟁론은 한말 의병들의 무장투쟁노선과 계몽운동의 실력양성론이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국외에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대체적인 합의를 이룬 것으로서, 민족 군대를 양성하였다가 일제가 중국. 미국. 소련 등과 전쟁을 일으킬 때 이들과 함께 독립전쟁을 감행하여 독립을 쟁취한다는 전략이었다. 이에 따라 독립운동이 전개되는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민족의 독립군을 양성하고 무장부대를 편성하는 사업이 추진되고 있었다.
독립전쟁의 주요 형태는 무장투쟁이었다. 양성한 독립군들을 동원하여 일본군과 항전을 전개하는 것이 무장투쟁이었다. 1910년대 후반부터 만주지역 독립군들이 수없이 많은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하였고, 1920년에는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르는 대첩을 거두기도 하였다. 그리고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중국의 반만 항일군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는 조선의용대가 중국군과 함께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1941년 미국과 일본간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후 한국광복군은 인도. 버마전선에서 영국군과 함께 대일전쟁을 수행하는 한편, 미국의 OSS와 연계하여 공동작전으로 국내진입작전을 계획. 추진하였다.
일제의 침략과 식민통치의 잔악성을 알리고, 한국의 독립에 대한 지원과 협조를 요청하는 외교활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광무황제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한 것이나 임정에서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한 것 등이 모두 그러한 활동이다. 외교활동은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국 미국동포 일각에서 주요한 전략으로 삼아 전개되었고,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과 더불어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인정받는 것을 주요 목표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