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7년 6월 민주화 운동 배경
1987년 6월 민주화 운동은 6월 항쟁 또는 6월 민주화 운동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대한민국 역사상 분수령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는 전두환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대한 수년간의 끓어오르는 불만의 정점을 의미하며 민주주의를 향한 한국 여정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987년 6월 운동의 뿌리는 1980년대 한국의 격동적인 정치 환경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80년 박정희 대통령 암살 이후 군사쿠데타를 통해 전두환 대통령이 정권을 잡았습니다. 전두환 정권 아래에서 정치적 반대 의견이 탄압되고, 시민의 자유가 위축되었으며, 인권 유린이 만연했습니다. 1987년 6월 만세운동의 기폭제는 학생 운동가 박종철의 죽음이었습니다. 박종철은 1987년 1월 반정부 시위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구속되었고 구금 중 고문을 당해 사망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시민들의 분노를 촉발했고 전두환 정권에 대한 대중의 반대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해 5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 의해 이 사건이 은폐, 축소된 것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이 일로 시위가 확산되는 가운데 6월 9일 연세대생이었던 이한열 군이 시위 과정에서 머리에 박힌 최루탄 파편으로 사경을 헤매게 되면서 이전까지 산발적으로 전개되던 민주화 투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1987년 6월부터 수십만 명이 전국에서 대규모 시위에 참여하면서 시위가 확대되기 시작했고, 노동자, 학생, 지식인, 종교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민주개혁과 전두환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했습니다. 시위는 비폭력적 성격을 띠고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와 같은 민주적 이상에 초점을 맞춘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이처럼 국민저항운동이 대규모로 확산되어 가니 전두환 정권은 시국수습을 위한 조치를 강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마침내 6월 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의 이른바 '6.29 선언'이라는 직선제 개헌 시국수습 특별선언이 발표되었습니다.
- 정부 단속 및 국제적 압력
점점 커지는 시위에 대응하여 전두환 정권은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진압 경찰과 군인을 투입하는 등 가혹한 진압을 실시했습니다. 정부의 반대 의견 진압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위는 계속해서 탄력을 받아 국내외적으로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한국의 핵심 동맹국인 미국의 정계와 여론도 결코 전두환에게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남미에서 자국의 이익을 위해 독재정권을 지원하곤 했지만, 그래도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였고 군부정권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를 강경하게 진압하는 것을 좋게 볼 리 없었고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며 정치 개혁을 추진하라는 압력을 넣었습니다. 국민과 국제사회의 거센 압력에 직면한 전두환 대통령은 정치 체제의 민주화를 위해 대통령 직선제 실시와 개헌을 추진하기로 합의했습니다. 1987년 6월 운동은 전두환이 정치개혁을 실시하고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실시하겠다는 6.29 선언으로 정점을 찍었고 그 결과, 한국은 1987년 12월 첫 번째 직선제 대통령 선거를 치렀고, 전두환이 직접 뽑은 후계자 노태우가 승리했습니다.
- 의의 및 평가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이 항쟁에 동참한 학생과 시민들의 요구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호헌철폐 독제타도', '직선제개헌'이라는 슬로건으로 모아졌기 때문이었습니다. 6월 민주화운동은 이러한 민주화 세력의 통합성, 즉 각기 다른 성격과 지향을 가진 여러 주체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최소 강령'하에 '최대 연합'으로 결집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은 한국 사회와 정치에 심오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는 군사 독재의 종식을 의미하고 이 나라에서 민주주의와 정치적 다원주의의 새로운 시대를 위한 길을 열었습니다. 이 운동은 전 세계 다른 권위주의 정권의 유사한 민주화 운동에 영감을 주었으며, 평화로운 수단을 통해 정치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일반 시민의 힘을 강력하게 상기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은 권위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를 상징하고 보다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정치체제의 토대를 마련한 한국 역사의 중추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이 운동의 유산은 한국에서 계속해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민주적 가치를 수호하고 모든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수호하는 것의 중요성을 일깨워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