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9 혁명의 원인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을 당시에는 미주적 가치와 실행에 대한 믿음이 한국사회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 있지 못하였다. 정부의 행동이 더욱 비민주적으로 되어가고 대규모의 부정선거가 자행됨에 따라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규탄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요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국민의식의 민주화는 대체로 광범위한 민주적 교육과 6.25 전쟁 후 급속한 도시화의 결과였다.
1950년부터 1960년 사이에 이승만의 추종자들은 이승만과 그의 정권에 대한 지지를 획득하기 위하여 여러 문제를 내어서 대중시위를 조작해 내었다. 국토를 양분시켰던 공산주의자들의 휴전협정을 반대하는 대중시위와 행진, 1952년에서 1956년의 기간 중 이승만을 재선에 나서도록 부추겼던 대중시위, 일본당국의 재일교포 북송결정ㅇ에 항의하는 대중집회 등이 그것 이었다. 이런 관제대중 동원은 1950년대 초반기 동안 어느 정도까지는 이승만의 인기를 회복시키고 유지시켜 줄 수가 있었으나 195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 국민들 사이에 이승만의 개인적 인기는 사라졌고 그의 권력은 오로지 경찰의 강제력에 의하여 유지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60년 3월 부정선거가 극에 달하였다. 이때 실질적으로 많은 공무원들이 이승만의 당선을 위하여 동원되었다. 이전의 선거에서는 경찰의 개입이 후보자등록, 선전활동, 투표과정에 국한되어 있었는데 반하여 내무부와 각 도의 경찰이 이제 실질적인 선거본부가 되어 투표총계를 조작하고 날조하였던 것이다.
선거전에서 야당선거원들은 계속해서 체포되고 탄압을 받았고, 반공청년단의 폭력단원들이 선거 당일 시민들이 투표권을 어떻게 행사하는가 감시하기 위하여 각 투표장에 나타났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경찰 지휘부와 내무부에 의해서 완전히 날조되었기 때문에 선거 결과 이승만은 총투표수에서 당선에 필요한 3분의 1보다 두 배 이상 많은 표를 얻었다. 이기붕은 180만 표를 얻은 장면을 제치고 840만 표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국회에서는 민주당이 선거가 "불법적인 것이고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반정부시위가 선거 전후 전국에 걸쳐 대도시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부정선거와 불법선거를 규탄하고 나섰던 것이다.
- 4.19 혁명 과정
4.19 혁명 전 수주일 동안 지방도시에서 고등학교 학생들이 불법선거 및 자유당과 경찰의 반민주적이고 억압적인 행위에 항의하는 시위를 산발적으로 행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상황의 급박성을 이해하려 들지도 않았고 그럴 수 있는 능력도 결여되어 있었다. 마산에서의 시위에 대하여 이승만은 4월 15일 그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고무되고 조종된 것"이라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하였고 이 비극 적인 사태에 책임이 있는 무분별한 사람들의 죄는 간과될 수 없다고 선언하며 이승만은 젊은 청년들을 폭동으로 유도하고 선동하는 정치적 야심가와 공산주의자들의 선전활동에 대하여 경고하였다.
이승만의 이런 견해는 협박과 강제력 행사를 그만두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으로 학생들을 더욱 격노하게 하였고 4월 18일에는 서울에서 시위하고 있던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경찰의 비호를 받고 있는 반공청년단의 폭력배들로부터 습격을 받았다. 시민과 학생들의 지지를 완전히 잃고 있었고 정권 유지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강력한 폭력을 사용하는 것뿐이었다.
4월 19일 약 3만 명의 대학생과 고등학교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그 가운데 수천 명이 경무대로 몰려들었다. 경찰은 데모대에 대하여 발포하기 시작했으므로 학생들의 시위는 폭동으로 화하였다. 전국적으로 부산, 광주, 인천, 목포, 청주 등과 같은 주요 도시에서 수천 명의 학생들이 가세하였다. 서울에서 자정까지 약 130여명이 죽고 1000여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기 시작한 직후 우리나라의 주요 도시에 계엄령이 반포되었다.
4월 19일 이후 데모와 폭동이 연일 계속되었고 이제는 학생이 아닌 일반시민들도 가담하였다. 이승만은 반정부시위에 관하여 더 이상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고 4월 21일 내각이 전국의 혁명적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이승만은 자유당을 비롯해 모든 사회단체와 결별하겠다고 말하며 시위군중을 진정시키려고 하였고, 앞으로 경찰을 포함한 정부관리들이 정치적 간섭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시위군중들은 점점 더 광포해지기 시작하여 반공청년들과 자유당간부의 집을 파괴하고 방화하며 다녔고 4월 25일 시위의 새로운 물결이 일어났다. 각 대학 300여 명의 교수들이 이승만의 사임을 요구하는 제자들을 지지하면서 서울시내를 행진하고 나섰다.
- 4.19혁명 결과-민주화 바람이 불다.
4월 26일 결국 새로 지명된 외무부장관 허정과, 계엄사령관 송요찬, 주한 미국 대사였던 맥카나기 의 충고를 받아들여 이승만은 대통령과 부통령의 선거가 새로 실시될 것이고, 헌법도 의원 내각제로 바꾸어질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4.19 혁명 후 경찰력의 마비로 자유당이 하룻밤 사이 붕괴됨으로써 경찰력이 자유당의 주요 골격을 이루어왔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이승만정권의 붕괴는 경찰력에 의하여 유지되었던 정치권력에 학생들이 앞장서 경찰에게 시위와, 관료적이고 부패한 정치를 참지못한 대중들에 의해 굴복하였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