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6 군사정변 배경
5.16 군사정변은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비롯한 대한민국 육군 장교들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즉각 정부를 장악하고 '군사혁명위원회'를 만들어 반공을 국시로 삼는다는 '혁명 공약'을 발표했다. 쿠데타를 '혁명'으로 미화한 것이다. 이 쿠데타로 제2공화국의 장면 내각은 출범 9개월 만에 무너졌고 박정희를 수반으로 하는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등장하였다.
'5.16 혁명' 또는 '5.16 군사혁명'이 '쿠데타' 또는 '군사정변'이라는 올바른 명칭을 갖게 된 것은 한 세대가 흐른 뒤였다. 1993년 출범한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이른바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펼치면서 '사월혁명'과 '5.16 쿠데타'를 복원한 것이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5.16 군사정변'으로 표기되기 시작했다.
1960년의 4.19혁명으로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자 대한민국 정부는 당시 수석국무위원 겸 외무부장관이던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내각으로 구성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난 상황에서 부통령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해야 했지만 부통령 장면은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기 위해 4월 23일 이미 사퇴한 상황이었고, 그다음 대행 순서는 수석국무위원 겸 외무부장관이 1순위였기 때문에 허정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것이다.
장면 내각은 10개월 동안 세 차례나 개각을 거듭하였고 교체 사유는 비리나 정책실패가 아니라 신파와 구파 간 균형 맞추기였다. 당시 장면정부 각료들의 평균임기는 2개월이었다. 정책이 연속성을 가지고 갈 수가 없었고, 국무위원들은 업무를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기 일쑤였다. 신파와 구파 간에 밥그릇 다툼으로 장관들이 바뀌는 모습을 국민들이 좋게 볼리도 없었다.
당시 국군에는 이승만 정권 때부터 군의 심각한 부정부패와 비리, 승진가도 중단에 불만을 품고 4.19혁명 이후 정군 운동을 벌여 미국과 충돌했던 일본의 장교 세력들이 있었다. 육군소장 박정희와 1961년 12월 강제 예편당한 김종필을 비롯한 육군사관학교 8기생을 중심으로 한 장교들은 이로 인해 1961년 5월 말 강제 예편이 예정되고, 비밀리에 쿠데타를 기획하게 되었다. 박정희 등은 이승만 정부 때 쿠데타를 하려 했으나 4.19로 무산되었다가 다시 진행한 것이다.
- 5.16 군사정변 결과
5.16 정변 당일 새벽 여러 사단에서의 병력 차출이 계획처럼 이루어지지 않자 정변 수뇌부에서는 정변 실패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육사 2기 출신이자 박정희의 동기인 한웅진은 '이렇게 병력 동원이 지지부진하니 차라리 야산이나 도시를 점거하고 협상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자 박정희는 '어디 병력이라도 출동해야 협상이고 나발이 고를 할 것이 아닌가'라고 하고 다른 계획을 시행하는 것조차 살짝 회의적으로 보았으나, 김포에 주둔하는 해병대 제1여단 병력 1500여 명이 여단장 김윤근 해병준장의 지휘로 합세한 후 한시름 덜게 되었다. 수도권 북단의 김포 최전방을 경계, 방어하는 임무를 지닌 해병대 제1여단 병력을 쿠데타를 위해 빼돌리고 전방을 비워둔 것은 자칫 북한의 남침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대단히 위험한 행위였다.
쿠데타 세력은 예비사단 병력과 포병단, 해병대와 육군 제1공수특전단 등을 동원하여 1961년 5월 16일 새벽 서울을 비롯 대구시, 부산시 등의 방송국 등 주요 시설을 무력으로 점거하였다.
서울의 주요 방송국과 청와대를 접수하기 위해 병력을 한강 이남에서 한강 이북으로 이동 중 장도영이 출동시킨 육군 헌병대와 한강다리 위에서 교전이 벌어졌다. 서로 2시간 동안 대치하였으나 사상자는 나오지 않았고 김윤근이 지휘하는 해병대 병력이 한강다리를 돌파해 방송국 등을 점거하였고 같은 시각 문재준 포병대령이 지휘하는 육군 6사단 포병단 병력 1300여 명이 육본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들은 주한미군과 주한미국대사관의 공식적인 반대 성명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장도영과 대통령 윤보선을 회유함으로써 국무총리 장면을 사퇴시키고 60여 시간 끝에 제2공화국을 무너뜨려 행정부, 국회, 대법원의 역할을 포함한 대한미국의 전권을 군사혁명위원회로 가져왔다.
이튿날 아침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의 의장을 장도영으로 하고 자신을 부의장으로 하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하였으며 1962년 12월 31일까지 전국의 모든 정치인 활동을 일체 불법화하고 언론 사전 검열을 실시함은 물론 정기 간행물 1200 여 종을 모두 폐간시킨 뒤 2년 반 가량 군정을 실시했다.
미국은 이 사태가 공산주의 계열이 저지른 반역인 줄 알고 진압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한국의 군사통제권을 미군이 지니고 있었는데 박정희가 무단으로 군대를 동원했고 이에 화가 난 매그루더는 정부에 진압계획 승인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은 핑계를 들어 반대했고 결국 진압은 무산되었다. 집권한 군부도 적극적인 친미 반공정책을 펼쳤고 미국도 반공정권이 들어서는 게 이득이었기에 박정희의 5.16 정변을 묵인하였다.
- 하나회 조직의 시작
5.16 정변의 소식을 들은 육군 보병대위 전두환은 정변이 누구의 주도로 이루어진지 며칠간 주도면밀한 조사 끝에 박정희와 그 측근들이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당시 육사 교장이었던 강영훈 에게 사관 생도들이 5.16 정변을 지지하는 퍼레이드를 하는 것을 허가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교장은 생도들이 정치에 관여할 수는 없다며 거부했다. 전두환은 결국 강압에 가까운 끈질긴 설득으로 퍼레이드를 강행했고 이후 전두환은 박정희의 총애를 받는 심복이 되어 훗날 12.12 군사반란을 저지르는 하나회를 조직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