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 결정의 '오판'
1950년 봄 스탈린과 김일성, 박헌영 사이의 대화록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마지막에 박헌영이 언급했던 말이었다.
남한에서는 수십만의 공산주의자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북한이 전쟁을 일으켜주기만 기다리고 있으며, 전쟁이 발발하면 남한의 곳곳에서 봉기가 일어날 것이며, 이를 통해 전쟁을 쉽게 빨리 끝낼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미군의 참전 여부에 대한 '오판'의 문제보다도 더 중요한 부분이다. 박헌영의 말대로 남한 내부에서 광범위한 봉기가 일어날 경우 미국이 개입한다고 하더라도 전쟁이 북한의 승리로 발리 끝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탈린과 김일성은 이 전쟁이 속전속결로 끝나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남한에서는 어떠한 봉기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는 또 다른 '오판'이었다. 이미 남한의 공산주의 조직은 1945년부터 1948년의 기간 동안 재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붕괴되었다. 1946년의 9월 총파업과 10월 추수폭동, 1948년의 단선단정 반대투쟁과 4.3 제주항쟁, 그리고 여순사건 등으로 대부분의 공산주의 조직들이 적발되었다. 여순사건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모든 국가 기관에서 공산 주의자들을 체포하였다.
스탈린에게 제시한 남한의 혁명세력에 대한 박헌영의 주장은 잘못된 주장이었다. 이것이 남한의 상황에 대한 '오판' 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왜곡된 주장을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른 평가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잘못된 주장이 6.25 전쟁이 발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는 미국의 개입 여부보다도 더 중요한 전쟁 결정의 근거가 될 수 있다.
- 대한민국 내부의 혼란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내의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박헌영과 같은 좌익 정당, 김구와 같은 국내파의 민족주의 독립 운동가들, 그리고 이승만과 같은 해외파 독립운동가들은 서로를 불신하였고, 그 결과 대한민국은 여러 개의 정당이 난립되는 등 심각한 정치 사회적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김규식 등은 좌우파의 합작과 협력을 추진해 왔고 양자를 중재해 보기 위해 한 차례 평양을 방문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장덕수 암살 사건으로 이승만과 사이가 틀어진 김구가 동참하여 힘을 얻는 듯했으나, 김일성이나 이승만이나 모두 강경한 태도를 굽히지 않았으므로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김일성에게 적극적인 군사력 지원을 제공한 소련과 달리 미국은 이승만이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 결과 대한민국의 군사력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비하여 매우 취약한 상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49년 9월 30일 외신 기자 회견에서 "우리는 북한의 실지를 회복할 수 있으며 북한의 우리 동포들은 우리들이 소탕할 것을 희망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등 '북진통일론'을 주장했다. 또한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라디오 방송에서 "아침은 개성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며 호전적인 발언을 하였다. 이런 북진통일론은 6.25 전쟁 당시 서울이 금방 함락될 정도로 군사력이 취약했던 것을 보면 분명히 실현가능성이 없는 공상일 뿐이었으나, 북한은 이를 전쟁의 빌미로 이용하려 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 6.25전쟁 요약
제2차 세계대전 후 심화되고 있던 미국 소련의 냉전체제하에서 한반도는 1945년 광복과 동시에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 북이 분단되어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에도 계속적인 좌. 우익의 대립으로 남한의 사회는 몹시 불안정하였다. 6.25 전쟁은 이런 남한의 정세와 스탈린의 세계공산화 전략, 모택동의 전쟁지원 약속 등에 고무된 김일성의 무력적화 통일 야욕에서 비롯된 기습남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38선 전역에 걸친 북한의 전면 남침을 통해 발발하였다. 본래 남북한 간의 전쟁으로 시작되었으나 전쟁 발발직후 유엔군이, 유엔군의 38선 돌파 이후 중국군이 개입함으로 싸 국제적으로 비화되었다. 1951년 초부터 전선이 38선 부근에서 교착되고 전쟁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양측은 휴전회담을 개시하여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에 조인하였다. 전쟁으로 남북한 모두가 막대한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입었으며, 국제적으로는 냉전이 심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