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전쟁과 달리 전쟁의 명분을 찾기 힘든 6.25 전쟁 관련 연구들은 그 기원을 찾고 이를 통해 발발의 원인과 책임을 규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지만 지금까지의 연구들은 대체로 새로운 자료의 발굴에만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6.25 전쟁 발발에 대한 연구가 '보편성'을 획득할 수 없었고 이를 통해 다른 전쟁의 경우와 비교한다든가 현재적인 의미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단지 '실증적'연구에만 의존할 따름이었다. 구 소련에서 공개된 자료들 중 핵심적인 자료들을 중심으로 전쟁 발발의 기원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 6.25 전쟁 발발 전 1950년 3얼 말에서 4월 중순 사이 김일성과 박헌영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과 만났다. 이 방문에서 김일성과 박헌영, 스탈린 사이에서의 대화록은 1994년 옐친 대통..

- 환국 해방이 되자 임시정부는 환국을 준비하였다. 중국국민당정부에 외교업무를 담당할 주화대표부를 설치하고 이를 통하여 중국 내 동포사회의 파악과 귀국 주선 및 생활 안정에 도움을 주도록 하며 공식적으로 환국할 준비작업에 나섰다. 그러나 국토가 미국과 소련에 의해 점령되었고, 임시정부의 환국도 남한 점령국가인 미국의 정책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었다.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가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을 요청하였지만 미국과 영국의 자세는 이에 매우 부정적 이었었다. 첫째 이를 국제적으로 승인할 경우 남한에 대한 중국정부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강할 것이라는 우려였고, 둘째 임시정부를 승인할 경우 영국에 있던 폴란드 망명 정부의 승인도 검토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소련이 반대하고 나설 것이라는 점을 우려하..

- 난징시기 임시정부를 이끌어 가던 안창호가 체포되고 김구 등 주요 인물들이 일제의 추적을 피해 잠적하여 극비리에 활동하는 동안 임시정부는 가장 미약한 모습을 보였다. 상하이를 떠나 난징 근처인 진강에 정부 청사를 마련하였다. 난징에 청사를 두지 못한 것은 일본이 중국정부에 대해 강력하게 견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강에 청사를 두었지만 사실상 김구와 이동녕 등의 핵심 인물들은 난징성내에 비밀 거처를 마련하고 청년 모집과 군사력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김구는 난징의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교내에 자리 잡은 장제스의 관저에서 회담을 가졌다. 이봉창과 윤봉길의 양대 의거를 치하하는 장제스에게 김구는 한인 청년들을 군사간부로 양성할 수 있는 길을 요구하였고 뤄양군관학교에 한인 청년들을 입학시킬 수 있었다. 한국..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특징 한국의 독립운동이 다른 국가와 민족에 비해 독특한 부분을 가졌다. 여러 특징 가운데 하나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거론할 수 있다. 독립운동을 정부조직체로 펼쳐나간 점과 27년 가까이 존립하면서 활동한 사실은 세계사적으로 특이한 사실이다. 임시정부에 관한 연구는 많은 굴곡을 거쳐왔다. 오랜 기간 동안 투쟁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귀국하는 단계에서부터 제자리를 찾기 힘들었고, 해방정국에서는 남북분단과 미군정의 정책 및 이승만의 배척 때문에 중국에서 보낸 시련보다 훨씬 모진 시련이 있었다. 임시정부사 연구는 1960년대 중반 이후에 겨우 고개를 내밀게 되었다. 1970년대 들어 독립운동사 연구가 시작되었고, 임시정부사 연구도 서서히 시작되었다. 그러나 분단과 냉전논리에 따라 독립운동사 전..

- 시기별 독립운동 독립운동은 일제의 침략을 받으면서부터 식민지 상태를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국내를 비롯하여 한인이 거주하고 있던 세계 각 지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독립운동은 일제의 침략을 받으면서부터 1945년 해방까지 한 순간도 단절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1894년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갑오변란'과 1895년 민비시해사건 등을 계기로 의병이 봉기하였고, 이들은 전국 각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1905년 을사조약으로 국권을 상실하고 반식민지 상태에 놓이게 되자, 유생과 농민들이 주도한 의병이 재기하여 일제를 무력으로 몰아내고자 하였고, 개화지식인들은 실력양성을 위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전후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을 주도한 세력들은 국외..

- 독립운동 20세기 전반기는 우리 민족의 반만년 역사에서 최대의 시련기였다. 명치유신 이후 강력한 군국주의를 표방한 일제가 우월한 군사력을 앞세워 대륙팽창정책을 추진하며 대한침략을 해왔기 때문이다. 일제는 강화도조약으로 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한 이래 청나라와 러시아 세력을 차단하기 위해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연이어 도발하며 대한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로 우리나라는 결국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이러한 일제 침략과 지배를 결코 좌시하지 않았다. 일본으로부터 국가와 민족을 수호하기 위해 처절한 투쟁을 벌였던 것이다. 의병 전쟁을 비롯하여 개화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정치사회단체의 계몽운동, 교육 언론활동, 산업진흥을 통해 실력양성운동 등 이 시기에 다양한 형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