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박정희 대통령 당선 대한민국 제5대 대통령 선거는 대한민국의 5대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이다. 1963년 10월 15일에 직접 선거 방식으로 치러졌다. 본 선거에서 미주공화당의 박정희 후보가 민정당의 윤보선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63년 12월 17일 제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박정희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한국의 세 번째 공화 헌정 체제인 제3공화국이 출범했다.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정변 주도세력이 만든 입법, 사법, 행정 3권을 장악한 최고 통치기구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해 실시된 군정 1년 7개월 만에 박정희는 합법적으로 대한민국의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올랐다. 박정희는 1963년 12월 17일 취임했으므로 4년 뒤인 1967년 12월 16일 제5대 대통령으로서의 임기..

- 5.16 군사정변 배경 5.16 군사정변은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비롯한 대한민국 육군 장교들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즉각 정부를 장악하고 '군사혁명위원회'를 만들어 반공을 국시로 삼는다는 '혁명 공약'을 발표했다. 쿠데타를 '혁명'으로 미화한 것이다. 이 쿠데타로 제2공화국의 장면 내각은 출범 9개월 만에 무너졌고 박정희를 수반으로 하는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등장하였다. '5.16 혁명' 또는 '5.16 군사혁명'이 '쿠데타' 또는 '군사정변'이라는 올바른 명칭을 갖게 된 것은 한 세대가 흐른 뒤였다. 1993년 출범한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이른바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펼치면서 '사월혁명'과 '5.16 쿠데타'를 복원한 것이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 4.19 혁명의 원인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을 당시에는 미주적 가치와 실행에 대한 믿음이 한국사회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 있지 못하였다. 정부의 행동이 더욱 비민주적으로 되어가고 대규모의 부정선거가 자행됨에 따라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규탄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요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국민의식의 민주화는 대체로 광범위한 민주적 교육과 6.25 전쟁 후 급속한 도시화의 결과였다. 1950년부터 1960년 사이에 이승만의 추종자들은 이승만과 그의 정권에 대한 지지를 획득하기 위하여 여러 문제를 내어서 대중시위를 조작해 내었다. 국토를 양분시켰던 공산주의자들의 휴전협정을 반대하는 대중시위와 행진, 1952년에서 1956년의 기간 중 이승만을 재선에 나서도록 부추겼던 ..

- 전쟁 결정의 '오판' 1950년 봄 스탈린과 김일성, 박헌영 사이의 대화록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마지막에 박헌영이 언급했던 말이었다. 남한에서는 수십만의 공산주의자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북한이 전쟁을 일으켜주기만 기다리고 있으며, 전쟁이 발발하면 남한의 곳곳에서 봉기가 일어날 것이며, 이를 통해 전쟁을 쉽게 빨리 끝낼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미군의 참전 여부에 대한 '오판'의 문제보다도 더 중요한 부분이다. 박헌영의 말대로 남한 내부에서 광범위한 봉기가 일어날 경우 미국이 개입한다고 하더라도 전쟁이 북한의 승리로 발리 끝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탈린과 김일성은 이 전쟁이 속전속결로 끝나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했음에도 불..

1949년에는 전 세계를 뒤흔든 두 가지 큰 사건이 발생했다. 중국의 공산혁명과 소련의 핵개발이었다. - 소련과 중국 중국의 공산 혁명은 미국에 또 다른 충격을 주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전후 구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미국은 전후 중국국민당을 축으로 해서 일본을 무장해제 하면서 아시아 정책을 실시하려고 했다. 이러한 정책의 연장선산에서 미국은 장개석의 국민당에게 일본 점령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공산당과의 내전으로 인해 일본 점령에 참여하지 못했다. 이러한 과정은 다른 한편으로 일본에 대한 전후 처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중국의 공산화로 인해 미국은 역코스 정책을 통해 일본을 재무장하여 미국의 아시아 파트너로 만드는 새로..

다른 전쟁과 달리 전쟁의 명분을 찾기 힘든 6.25 전쟁 관련 연구들은 그 기원을 찾고 이를 통해 발발의 원인과 책임을 규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지만 지금까지의 연구들은 대체로 새로운 자료의 발굴에만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6.25 전쟁 발발에 대한 연구가 '보편성'을 획득할 수 없었고 이를 통해 다른 전쟁의 경우와 비교한다든가 현재적인 의미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단지 '실증적'연구에만 의존할 따름이었다. 구 소련에서 공개된 자료들 중 핵심적인 자료들을 중심으로 전쟁 발발의 기원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 6.25 전쟁 발발 전 1950년 3얼 말에서 4월 중순 사이 김일성과 박헌영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과 만났다. 이 방문에서 김일성과 박헌영, 스탈린 사이에서의 대화록은 1994년 옐친 대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