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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결정의 '오판', 대한민국 내부의 혼란, 6.25전쟁 요약 - 전쟁 결정의 '오판' 1950년 봄 스탈린과 김일성, 박헌영 사이의 대화록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마지막에 박헌영이 언급했던 말이었다. 남한에서는 수십만의 공산주의자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북한이 전쟁을 일으켜주기만 기다리고 있으며, 전쟁이 발발하면 남한의 곳곳에서 봉기가 일어날 것이며, 이를 통해 전쟁을 쉽게 빨리 끝낼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미군의 참전 여부에 대한 '오판'의 문제보다도 더 중요한 부분이다. 박헌영의 말대로 남한 내부에서 광범위한 봉기가 일어날 경우 미국이 개입한다고 하더라도 전쟁이 북한의 승리로 발리 끝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탈린과 김일성은 이 전쟁이 속전속결로 끝나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했음에도 불.. 2024. 1. 27.
공산주의 소련과 중국의 영향, 두 번째 대화록 1949년에는 전 세계를 뒤흔든 두 가지 큰 사건이 발생했다. 중국의 공산혁명과 소련의 핵개발이었다. - 소련과 중국 중국의 공산 혁명은 미국에 또 다른 충격을 주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전후 구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미국은 전후 중국국민당을 축으로 해서 일본을 무장해제 하면서 아시아 정책을 실시하려고 했다. 이러한 정책의 연장선산에서 미국은 장개석의 국민당에게 일본 점령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공산당과의 내전으로 인해 일본 점령에 참여하지 못했다. 이러한 과정은 다른 한편으로 일본에 대한 전후 처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중국의 공산화로 인해 미국은 역코스 정책을 통해 일본을 재무장하여 미국의 아시아 파트너로 만드는 새로.. 2024. 1. 26.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전, 김일성과 스탈린의 대화록, 대화내용 다른 전쟁과 달리 전쟁의 명분을 찾기 힘든 6.25 전쟁 관련 연구들은 그 기원을 찾고 이를 통해 발발의 원인과 책임을 규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지만 지금까지의 연구들은 대체로 새로운 자료의 발굴에만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6.25 전쟁 발발에 대한 연구가 '보편성'을 획득할 수 없었고 이를 통해 다른 전쟁의 경우와 비교한다든가 현재적인 의미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단지 '실증적'연구에만 의존할 따름이었다. 구 소련에서 공개된 자료들 중 핵심적인 자료들을 중심으로 전쟁 발발의 기원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 6.25 전쟁 발발 전 1950년 3얼 말에서 4월 중순 사이 김일성과 박헌영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과 만났다. 이 방문에서 김일성과 박헌영, 스탈린 사이에서의 대화록은 1994년 옐친 대통.. 2024. 1. 26.
해방 후 환국, 독립운동 근대화론 - 환국 해방이 되자 임시정부는 환국을 준비하였다. 중국국민당정부에 외교업무를 담당할 주화대표부를 설치하고 이를 통하여 중국 내 동포사회의 파악과 귀국 주선 및 생활 안정에 도움을 주도록 하며 공식적으로 환국할 준비작업에 나섰다. 그러나 국토가 미국과 소련에 의해 점령되었고, 임시정부의 환국도 남한 점령국가인 미국의 정책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었다.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가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을 요청하였지만 미국과 영국의 자세는 이에 매우 부정적 이었었다. 첫째 이를 국제적으로 승인할 경우 남한에 대한 중국정부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강할 것이라는 우려였고, 둘째 임시정부를 승인할 경우 영국에 있던 폴란드 망명 정부의 승인도 검토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소련이 반대하고 나설 것이라는 점을 우려하.. 2024. 1. 25.